흔적의 기억, 기억의 흔적

      [길]에 갈무리함     2008. 9. 5. 14:25      
한 장을 사진을 보았습니다.
높이 솟은 담장 안 콘크리트 전철길, 그 아래로 목침을 베고 누운 좁고 구불거리는 단선 철길.
이제는 사라져버린 수인선의 흔적이었습니다.

수인선. 수원에서 인천까지 다니던 협궤열차.
사진을 보고 찾아 온 그 곳에서 협궤열차에 관한 두 가지 추억이 떠오릅니다.
흔적의 기억인 수여선과 기억의 흔적인 수인선.




할아버지 산소 가는 길.
온통 누런 황토인 구불구불한 길은 불 꺼진 가마들 사이를 지나갑니다. 가마 구석에는 초벌구이 때 깨져버린 조각들이 쌓여있어 그 것들을 주워 들고 신에 덕지덕지 묻은 황토를 닦아내기도 합니다.
그 길 옆으로는 졸린 소가 웅크린 듯 작은 언덕이 솟아 오르다 사라지기를 반복합니다.  가끔은 오래된 콘크리트 설치물이 난데 없이 논가에 솟아 오르기도 합니다. 잰 걸음으로 어른들의 걸음에 맞춰 걷던 나는 호기심에 옷자락을 잡아 끌며 손가락으로 가리킵니다. 지금은 사라진, 옛날 전쟁이 나기도 훨씬 전부터 있던 기차길의 흔적이란다. 할아버지가 어릴 적에는 저 기차를 타고 먹을 것을 구하러 이곳까지 오셨대...... 논에는 점점 무거워지는 벼가 누런 황토의 빛깔을 닮아 가고 있습니다. 어린 나는, 검은 연기를 뿜으며 달리는 기차가 까만 교모를 쓴 까까머리 할아버지를 태우고 그 언덕 위를 달리는 상상합니다. 어느덧 까까머리 할아버지는 내가 되고 기차는 구름이 뭉게뭉게 무리 진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흔적의 기억, 수여선.




포구 가는 길.
느릿느릿 한가로운 주말, 무심한 아빠는 오늘도 아무 말이 없이 나갈 채비를 하란다. 역시나 행선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주말의 이런 동행은 싫다. 결혼식이나 낯선 어른들만의 행사장이기 일쑤다. 퉁퉁 불은 얼굴로 신발을 꿰차고 따라 나선다. 역으로 가시는 아버지. 아마도 전철을 탈 모양이다. 그럼 서울...? 그런데 전철이 아닌 다른 입구로 들어가신다. 전철보다 작은 전철이 서 있다. 낮은 플랫폼에서 올라 탄 기차 안은 어린 내 눈에도 참 좁다. 의자에 앉으니 앞 사람과 대화를 해도 좋을 만큼 좁다.
그래도 처음 타는 낯선 열차에 들떠 내 얼굴은 발그레해진다. 기차가 출발하고 낯선 작은 역들에 서고 가기를 반복한다. 역이라고는 하나 마치 버스 정류장처럼 무심한 플랫폼들이다. 타고 내리는 이들도 빨간 다라이를 이거나 안은 할머니들이 대부분이다. 어느새 기차 내에 갯내가 배어든다. 대아 안에는 검은 돌게들이 스멀스멀 기어 다닌다. 갯내는 돌게 때문이 아니다. 어느 새 차장 밖으로는 검은 뻘들이 드리워 있고 기울어가는 소금창고들이 군데군데 보인다.
말없는 아버진 내 손을 잡고 내린다. 바람이 차다...... 아마도 겨울이거나 가을쯤인가 보다.
썰물 때라 그런지 포구는 한산하다. 어쩌면 주말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방학이었을 지도 모른다. 아빠는 사업의 실패로 힘든 시절이었으니까......
비릿한 갯바람과 물 빠진 검은 뻘에 기우뚱 정박해 있는 고깃배들. 아빠는 내 얼굴보다 커다란 튀김을 하나 쥐어 주신다. 지금까지도 그때만큼 커다란 튀김을 본 적이 없다. 철 지난 바닷가처럼 휑한 포구와 시장을 한 바퀴 돌면서 아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띄엄띄엄 이던 그 기차를 타고 돌아왔는지, 아님 버스를 타고 돌아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예전에 버스랑 기차가 부딪쳤는데 기차가 넘어져서 손님들이 기차를 세워서 타고 갔다는 우스갯소리를 해주던 건너편 할아버지의 웃음소리만 기억을 타고 맴돈다.

그 후로 기차가 없어진다는 소문을 들었다.
기차역은 커다란 백화점과 극장으로 변했다.
포구의 기차길은 다리가 되어 썰물 때도 사람들로 법석인 관광지가 되었다.
작은 전철역 옆으로 녹슨 기차길의 흔적이 남아 해바라기 밭이 되었다.
아빠는 결국 화해를 하지 못하고 어느 더운 여름날 내 곁을 떠나셨다.

기억의 흔적, 수인선.



엮임글 : 2008/08/07 - [길] - 아빠에게 가는 길

처음글 : 2008/09/05 14:25
고침글 : 2008/09/09, 제목을 "수인선, 협궤열차"에서 "흔적의 기억, 기억의 흔적"으로 바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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