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키가 변하는 그림자들은
한 장 열풍(熱風)에 말려 둥글게 휘어지는구나
아무 때나 손을 흔드는
미루나무 얕은 그늘 속을 첨벙이며
2시반 시외버스도 떠난 지 오래인데
아까부터 서울집 툇마루에 앉은 여자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대낮
신작로 위에는 흙먼지, 더러운 비닐들
빈 들판에 꽂혀 있는 저 희미한 연기들은
어느 쓸쓸한 풀잎의 자손들일까
밤마다 숱한 나무젓가락들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사내들은 화투패마냥 모여들어 또 그렇게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간다
여자가 속옷을 헹구는 시냇가엔
하룻밤새 없어져버린 풀꽃들
다시 흘러들어온 것들의 인사(人事)
흐린 알전구 아래 엉망으로 취한 군인은
몇 해 전 누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자는
자신의 생을 계산하지 못한다.
몇 번인가 아이를 지울 때 그랬듯이
습관적으로 주르르 눈물을 흘릴 뿐
끌어안은 무릎 사이에서
추억은 내용물 없이 떠오르고
소읍(小邑)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하다, 누구일까
세숫대야 속에 삶은 달걀처럼 잠긴 얼굴은
봄날이 가면 그뿐
숙취(宿醉)는 몇 장 지전(紙錢)속에서 구겨지는데
몇 개의 언덕을 넘어야 저 흙먼지들은
굳은 땅 속으로 하나둘 섞여들런지
[봄날은 간다] 기형도, "입속의 검은 잎" 中
그니가 제일 좋아했던 영화... 허진후감독의 봄날은 간다.
이상스레 그니와 함께 있는 동안 이 영화를 몇 번 볼 기회는 있었지만 끝까지 본 적이 없다.
그니와 헤어진 후... 한 참이 지난 후에야 난 봄날은 간다를 끝까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왜 그니가 이 영화를 좋아했는지... 왜 그니가 날 떠났는지...
알 수 있었다... ?
그 봄 이후론 봄마다 봄을 따라 떠났고,
여름이 오면 쉬었다.
올 봄에는 떠나지 못하였다.
몸도 마음도 깊은 곳에 숨어버린 봄.
책장을 뒤적이다 오랜만에 펼쳐본 기형도 시인의 책 속에서
봄날은 간다를 만났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 그니가 있었다면,
기형도시인의 봄날은 간다에는 내가 있었다.
습관적으로 주르르 눈물을 흘릴 뿐/ 끌어안은 무릎 사이에서/ 추억은 내용물 없이 떠오르고/
봄.날.은. 그.렇.게. 가.버.렸.다.
덧글;
아버지 기일에는 꼭 기형도 시인의 묘소에도 향을 하나 피우고 와야 겠다.
아버지 묘소 근처에 기형도 시인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도 찾지 못한 것이 벌써 십오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