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여행 - 1996(?)

      [길]에 갈무리함     2008. 6. 22. 17:10      
10시 55분 대합실
 
마이마이, 머라이어 캐리, 김건모, 건전지AA사이즈 1개, 삐삐, 지포라이터, 다이어리, 쌕, 우산.
 
일어나서 목욕탕에 물을 받으며 리모컨을 눌렀다. 대머리 연예인들과 방청객들이 나와 ‘대머리 치료될 수 있나’에 관해 열심히 토론 중이다.
어디를 갈까? 책상 위에는 91년 태종대에서 찍은 사진이 날 쳐다보고 있다. “5년 만이군!”
 
남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남홉니다. 멧세지를 남기세요. … … 삐~ …”
남호에게 연락이 왔다. 가자 춘천으로!
 
날이 찌뿌드 하다.
“며칠 간의 한 여름 날씨는 내일을 기해 수그러들고 곳에 따라 소나기가 …”
이 세상에는 간혹 예언이 맞을 때도 있다.
기적이 일어나기도 하고, 모세가 홍해를 가르기도 하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기도, 교통체증이 일어나기도, 회사 가기가 죽도록 싫어질 때도 있다.
 
난 여행의 제목을 생각했다.
백수탈출. 조사와 어미는 모두 잃어버린 두 개의 명사.
 
나 노트를 챙겨 들고, 안경집에 넣어 두었던 동전을 모두 가방에 넣었다.
세 정거장을 걸어 갔다. 하늘은 “니기미 더러운 세상, 에에이~ 툇” 내 얼굴에 침을 뱉는다.
 
여름이고 여긴 버스대합실이다.
춘천행 버스는 11시 40분. 30분간 난 할 일이 없다.
지나가는 여자애들의 종아리와 허리와 배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침을 맞은 나는 땅바닥에 침을 뱉는다.
엄마는 내게 침 뱉는 버릇을 고치라 하는데 난 화장실에 가면 변기에 침을 뱉고 소변을 본다. 참 더러운 버릇이다.
 
세 번째 정거장에는 은행 무인점포가 있다. 난 은행엘 가면 가능한 자동 입출금기를 사용한다. 그게 더 빠르고 편하고 맘이 놓인다.
행원의 낯간지러운 인사와 화장품 향기와 볼록 튀어나온 아담한 젖가슴 위의 이름표는 없지만, 기계는 날 긴장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무인점포가 좋다.
그리고 무인점포는 24시간이다.
난 통장에 있던 10만원을 다 꺼냈다. 내 한 달 용돈의 나머지다. 어쩌면 이 통장엔 다시 입금을 못할지 모른다.
나의 잦은 무단결근을 회사에서는 원하지 않을 것이고 난 짤릴 가능성이 크다.
 
방금 남호의 환청이 들렸다.
이 시끄러운 대합실에서 환청은 가능한 기적이다.
 
3년에 천만 원을 타는 적금을 위해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회사에 다닌다면?
그런데 그게 나의 현실이었고 꿈이 었다.
적금만 타면 그만 둬야지 … …
 
난 터미널로 가는 가장 긴 코스의 시내버스를 탔다. 우울한 도시를 빙빙 도는 결코 자신의 궤도를 벗어나지 못하는 무한궤도의 시내버스.
전화박스, 장안문, 팔달문, 학교 안 간 날라리 계집아이들… 모두 참신하고 깨끗하고 새로워 보인다.
 
서점엘 갔다. 10시 30분의 서점. 10시 30분의 까페와 별반 다르지 않다. 어쩌면 내가 첫 손님(돈을 치르는) 일 수도 있다.
외국 서적 난에서 난 ‘아웃사이더’를 찾았다. 한 줄, 두 줄, 세 줄 … …
점원 아가씨는 계속해서 전화에다 주문을 한다. 지금 기억에 남는 대화는 “아무도 장군에게 편지하지 않는다 나왔어요?”
나도 장군에게는 편지를 해 본적이 없다. 하고 싶은 적은 있었다.
이등병시절 고참에게 얼차려를 받을 때, 죽이고 싶지만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에, 없는 빽이지만 누구에게라도 하소연하고 싶었다. 그러나 전방에는 사람이 없다. 오로지 군바리만이 있었지…
남호는 ROTC로 이번 달에 전역한다.
 
지금 버스에 올랐다. 춘천까지 2시간. 5천 7백원…
춘천에 놀러 가는 젊은이들이 뒤에서 떠든다. 의경 하나가 춘천에서 여자 꼬시는 법을 놀러 가는 애들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참 후한 강원도 인심이다. 제기랄…
 
아웃사이더는 소설이 아니라 철학란에 있었다. 아마 이번 여행 중에 10장쯤 읽으면 많이 읽으리라. 내 버릇이다. 여행 갈 때 꼭 한 권의 책을 산다. 그러나 읽지는 않는다.
가방만 무거워 질 뿐…
 
37분. 3분 후면 버스는 떠나고 난 이 지긋한 인생에서 잠시나마 아웃사이더가 될 수 있다.
내가 어디 갔는지는 남호 밖에 모른다.
 
버스 안에 여자라곤 40대 아줌마 한 명뿐이다. 지겨운 여행이 되겠군.
 
 
 
1시 38분 휴게소
 
심플 한 갑을 샀다. 라이터 오일이 떨어졌다. 노란 티의 장발아저씨에게 불을 빌렸다.
예전에는 불이 여성들의 힘이었는데 이젠 남성들의 정력의 상징이다.
아니 정정하자. 이젠 남성들의 상징도 아니다. 남성들도 그 힘을 잃어가니까.
 
강원도가 많은 이들에겐 휴식의 공간으로 다가오겠지만, 이 땅에서 3년의 세월을 기다림으로 채운 남성들에겐 또 다른 의미의 땅이다.
지금 이 홍천을 향해가는 길은 나에겐 3년 동안 휴가 복귀 때 다닌 길이었다.
자유를 잃어버리는 길. 다시 몇 달 동안 사람이라고는 구경 할 수 없고, 동서로 길게 뻗은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믿어지지 않는 전쟁놀이만을 생각해야 하는 곳으로 가는 길이었다.
 
하늘이 너무 흐리다. 주변이 모두 수채화에 금기시된 검은 색을 섞은 풍경으로 다가온다.
 
알프스의 제일 높은 곳을 나는 새는 독수리가 아니라 노란부리까마귀다.
 
버스가 떠난다. 공간에서 공간으로, 시간에서 시간으로의 이동.
시간과 공간은 동전의 양면이다.
 
버스가 너무 흔들린다.
다시 머라이어 캐리릐 음악 속으로 들어가야 겠다.
춘천에는 비가 오지 않을까?
이 시간, 그 공간에는 … …
 
 
 
3시 33분 어린이 회간 앞
 
다시 왔다. 잠시 길을 잃고 헤메였지만 물 앞에 와서 앉았다.
중도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갑자기 중도는 추억 속의 섬으로 남겨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춘천은 물과 안개가 많은 도시다. 그래서 좋다.
마음이 편하질 않다. 전처럼 홀가분하게 오질 못했기 때문이리라. 아직 내 일상은 해결되지 않고 얽혀있는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방금 세 살배기 아들과 몇 개월 되지 않은 아기를 안은 부부가 지나갔다.
행복이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오르며 따사로움이 느껴졌다.
허전함. 난 그 안으로 뛰어들지 못하고 있다. 2주 만에 핀 담배는 쓰다.
바람이 분다. 호수에는 요트들이 미끄러지듯 달리고 있다.
이 풍경이 스냅사진 안으로 나도 뛰어들고 싶지만 결국 여기에서도 이방인이다.
아웃사이더를 단 한 줄도 읽지 않았다. 버스 안에서는 내내 자거나 음악을 들었다.
전에는 여기에 따가운 햇살과 휴일의 소란함이 있었다.
지금은 바람과 한적함만이 있다.
어제 국제마임대회가 끝났단다. 물결의 파장이 내 시야을 어지럽히고 있다. 나도 오늘은 물결이고 싶다.
파란 청바지와 파란 티를 걸치고 있는 난 저 물결을 파랗게 물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호수는 어둡다. 하늘이 어두워서다.
다시 걷자.
기형도가 생각난다. 전부터 있던 버릇이긴 하지만, 내 여행노트를 꾸준히 쓰게 한 것은 그의 유고집때문 이니까.
 
 
 
7시 21분 버스 안
 
안개의 도시.
안개 낀 다리를 건너왔다.
다리 아래로 안개가 흘렀다.
만 하루의 일상탈출이 끝나간다.
이제 오늘 하루가 시작하는 시간이지만
아직 하루 동안의 백수생활이 남았지만
몸도 마음도 지쳐있다.
차창 밖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인다.
너무도 많이 걸었고, 너무도 많이 고민했고, 너무도 많이 기다렸고, 너무도 많이 실망했고,
너무도 많이 마셨나 보다.
이제 13분 후면 버스는 수원을 향해 내 일상이 있는 공간으로 돌아갈 것이다.
만 하루 동안 난 내가 얻고자 했던 것을 얻었던가?
아니다.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아무 것도 버리지 못하였다.
난 내 방황의 근원을 안다.
그건 아름답게 남아야 할 추억의 한 페이지가 언제부터인가 갈갈이 찢기우고 불살라졌기 때문에 오는 상실감이다.
강은 흐른다. 눈부시도록 반짝이며 그 속으로 빠져들고 싶도록 아름답게 흐른다.
이제 버스는 떠난다.
나도 흐른다.
 
 
 
3시 31분 시내버스
 
여행은 끝났다.
이젠 일상의 공간만이 남았다.
오늘 길에 윤정이를 만났다.
비슷한 성향의 사람에게서 오는 동질감과 편안함.
일상적이지만 일상적이지 않던 이야기들.
밖의 날씨에 상대적으로 시원한 지하 공간.
일상과 상대적으로 한가한 시간.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은 우리의 젊음을 담보로 하고 있었다.
 
낭만적인 너무도 낭만적인 그래서 이성적인
이성적인 너무도 이성적인 그래서 낭만적인
날씨는 너무 더워 겨울을 향하고
젊음은 너무도 아름다워 죽음을 향하고
이제 여행도 끝나고
 
난 내 삶을 다시 포맷(format)했다고 믿고 싶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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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은 악몽이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꿈. 꿈.
지옥의 아가리를 찢어 벌리고
거친 숨을 몰아 쉬는
천식환자의 목아지다.
 
 
 
 
덧글 ;
96년 경의 여행기록이다. 날짜도 없고 단지 시간만 적혀있는 1박 2일의 여행기록.

덧글 2 ;
“아무도 장군에게 편지하지 않는다”와 유사한 제목의 책은 아무리 뒤져봐도 없다. 내 기억회로의 혼선이 빚어졌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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