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두려움
낯선하루
2008. 10. 26. 01:33
칼로 사과를 먹다
사과 껍질의 붉은 끈이
구불구불 길어진다.
사과즙이 손끝에서
손목으로 흘러내린다.
향긋한 사과 내음이 기어든다.
나는 깍은 사과를 접시 위에서 조각낸 다음
무심히 칼끝으로
한 조각 찍어올려 입에 넣는다.
"그러지 마, 칼로 음식을 먹으면
가슴 아픈 일을 당한대."
언니는 말했었다.
세상에는
칼로 무엇을 먹이는 사람 또한 있겠지.
(그 또한 가슴이 아프겠지)
칼로 사과를 먹으면서
언니의 말이 떠오르고
내가 칼로 무엇을 먹인 사람들이 떠오르고
아아, 그때 나,
왜 그랬을까 ……
나는 계속
칼로 사과를 찍어 먹는다.
(젊다는 건,
아직 가슴 아플
많은 일이 남아 있다는 건데,
그걸 아직
두려워한다는 건데.)
황인숙 시집.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문학과 지성 시인선 147
언제적일까?
웬만해서는 책에 밑줄을 긋지 않는 내가 참고서에나 그었을 법한 노랑 형광색으로 진하게 밑줄을 그어 놓았다.
"젊다는 건, 아직 가슴 아플 많은 일이 남아 있다는 건데,
그걸 아직 두려워한다는 건데."
아마도 그만큼 절박했던가보다. 아직 젊다는 것이, 아직 가슴 아플 일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이, 그것들이 너무도 두렵다는 것이...
그래서 그 절박함을 눈에 잘보이게 하려고 책장깊이 스며드는 노랑 형광팬으로 그렇게 진하게 밑줄을 그어 노았던게다.
한때 빨리 늙고 싶었다. 겨울잠을 자듯 이 잠을 자고 일어나면 이 지긋지긋한 젊음이 모두 사라져 버리고, 평온한 노년의 삶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를 갈망하며 잠들곤 하였다.
그때는 삶의 속도가 걸음의 속도와 같은 줄 알았다. 느리게 걷는 노인들의 걸음이 그들의 삶의 여유로움을 말해주는 듯했으니까.
그러나 다시 시간은 흐르고 점점 내가 원하던 노년으로 가까이 가고 있음에도, 내가 원하던 유유히 흐르는 삶은 주어지지 않았다.
도리어 네버랜드를 벗어나도 피터팬에서 주어진 삶은 똑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절망감이란...
나는 아직도 칼로 사과를 찍어먹는 위험한 행동을 하고 있다.
아마 내 허리가 구부정해지고, 내 걸음의 속도가 더 이상 느려질 수 없어 전동 휠체어를 타고 다니게 되더라도, 난 칼로 사과를 찍어먹는 위험한 행동을 하고 있을 것이다.
젊어서가 아니다.
가슴앓이가 부족해서도 아니다.
단지 두렵기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