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
천상병
낯선하루
2008. 9. 30. 12:41
사진이라니
육명심이라는 사진가가
내 입상(立像)을 찍어서
벽 앞에 섰는 모습인데
그 사진이
일본의 아사히 신문사에서 나오는
아사히 카메라에 발표되었습니다.
아사히 카메라라는 사진잡지는
세계에서도 굴지(屈指)의 사진잡진데
그런 잡지에
나 같은 놈의 사진이
어찌 나왔더란 말입니까?
그리고 또
한국사진가협회 기관지 「사협(寫協)」에
최홍만이라는 사진평론가가
'꾸밈없는 사람들'이라는
육명심 씨의 사진평을 썼는데
그 평론에는
내 이름이 열 번이나
들먹여지고 있었으니
참으로 진귀한 일입니다.
한국의 사진하고는
나는 아무 관련이 없었는데
사진작가 육명심 씨는
나를 왜
아주 기쁘게도 괴롭게 구는 겁니까?
몸과 마음이 아주 가난한 이 놈을…….
천상병 시집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 오상출판사, 1994
천상병 시인을 만나다.
비록 선생님이 '사진이라니'에서 언급하신 육명심작가의 작품이 아닌
김영일작가의 작품이지만 커다란 벽 앞에 섰는 모습의 천상병 입상을 만나다.
올림픽이라는 커다란 운동회를 치루어야 할 나라에 근사한 현대미술관 하나 없어서야 국가의 체면이 서겠느냐는 윗분의 한 마디에 짓고 있던 '자연사박물관'을 급조해서 탄생한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그래서 동물원과 놀이공원 사이에 앉아 버린 동물원 옆 미술관에서 <한국현대사진 1948~2008>전을 하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다앙한 사진들 틈에 어눌한 표정의 선생님이 서 계시다.
김영일. Portrait-천상병. 1992. 시바크롬 프린터.
선생님 실물보다 조금은 클 듯한 사진.
앙다문 입.
짙은 청색 겨울 잠바는 너무 커서 헐렁하다 못해 추워보이신다.
잠바에는 꼬질꼬질한 때자국과 막걸리가 분명해 보이는 물자국들이 선명하다.
길가다 지나치면 영락없는 노숙자의 모습이다.
시처럼 평온하고 아이같은 표정이 아니다.
앙다무신 입과 깊게 카메라를 응시하는 눈은 삶너머를 바라보듯하다.
선생님의 아이와 같은 천진함이
육신과 정신이 만진창이가 되어버린 끔찍한 고문 후의 깨달음이란 것을 생각하면
저 깊은 눈빛이 말하는 바를 조금은 읽어 볼 것도 같다.
자연사박물관이 되었어야 할 미술관에서 천상병을 만나다.
몸도 마음도 황폐한 놈이
몸과 마음이 아주 가난한 시쟁이 천상병을 만나다.
가난함과 황폐함은 같은 것이 아님을
앙다문 입과
삶너머를 바라보는 눈으로
선생님은 말씀해 주신다.
2008년 구월, 1992년의 천상병을 만나다.
<한국현대사진 1948~2008>전.